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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인 제가 할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음 선교사로 불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사진)가 소천했다. <관계기사 4면>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노환으로 인해 21일 오전 7시46분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 지역 자택에서 9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1918년 11월7일 노스캐롤라이노주 샬럿에서 태어난 그는 성서신학교와 휘튼대학교를 졸업하고 21세(1939년)때 목회자가 됐다. 그레이엄 목사는 1949년 LA에서 열린 부흥집회를 계기로 미국 전역에 복음 선교사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집회가 열렸던 LA지역 워싱턴 불러바드와 힐 스트리트에는 8주 동안 무려 35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이후 그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일생동안 185개국 이상을 돌며 2억 명 이상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했고 34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레이엄 목사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신앙적 멘토로도 활동했다. 세계 각국 정상들을 만날 때도 종교와 관련된 조언을 해왔다. 그는 매년 갤럽이 실시하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60년 연속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레이엄 목사가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열 기자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21

아이젠하워 이후 12명 대통령의 영적 멘토

2005년 6월26일 뉴욕 퀸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마지막 전도집회가 열렸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를 했던 그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생애 마지막 집회를 조크로 매듭지었다. "여러분 모두를 훗날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반드시 사진기 챙겨 오세요." 그 한마디는 청중의 웃음보와 눈시울을 동시에 건드렸다. 당시 전립선암 파킨슨병 등을 앓으며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시작하던 그가 누구나 두려워할 수 있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20세기 후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를 창설해 세계를 돌며 유명 부흥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미남 목회자였다. 체격과 언변까지 좋았던 그레이엄 목사는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자 캘리포니아 모데스토 지역 전도 집회(1948년)에서 일종의 자기 선언을 한다.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유혹을 피하기 위한 다짐이었다. 그는 "유명 목사들이 가족과 떨어져 집회를 다니다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거나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 유명한 '모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으로 오늘날 '빌리 그레이엄 룰'로 불린다. 그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한국전쟁 도중 방한(1952년)해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이가 한경직 목사다. 당시 한 목사는 영락 교회 부지 문제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딱한 사정을 듣고 이후 전도집회 때마다 한 목사를 데리고 다니며 교회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 때문에 미국 교계는 한국전 직후 한국 교회들이 처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며 헌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이후 5차례(1956년.1973년.1980년.1984년.1991년) 더 한국을 찾았다. 특히 서울 여의도에서 진행됐던 집회 때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기독교 집회 사상 단일 행사에 최고 군중이 모인 기록이었다. 또 외국인 목사 최초로 두 번(1992년.1994년)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설교를 하고 미국의 대북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었다. 교계에서는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이 당시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국민 목사(America's Pastor)'로 불렸다.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등으로 미국 전체가 슬픔에 잠겼을 때 그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위로를 전했다. 정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만 역대 대통령들과의 관계는 긴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12명 대통령의 조언자이자 영적 멘토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삶은 투병 생활 속에서도 곳곳에 울림을 전했다. 그의 아들(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소셜네트워크에 가족들 사진으로 빼곡한 아버지의 책상 모습을 공개해 가족애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항상 유명 인사만 상대할 것 같지만 한 무명의 여성이 BGEA 웹사이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하는가"라며 고민의 글을 남기자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모두 부자가 되거나 형통할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물질의 부유함보다 더 귀한 건 영적인 부유함이니 그것을 좇으라"고 직접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물론 그레이엄 목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1950년대 미국 내 좌파 마녀사냥을 부추겼고 걸프전을 앞두고 대표 기도자로 나서 전쟁을 옹호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또 2012년 모르몬교 신자인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려고 BGEA 웹사이트에 '모르몬교는 이단'이라고 명시된 부분을 슬쩍 삭제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내부에서 신학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평소 손자(윌리 그레이엄)에게 "언젠가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야. 그러나 죽음은 하늘 나라로 거주지 주소를 바꾸는 것뿐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왔다. 2018년 2월 21일. 그레이엄 목사는 그렇게 기쁨으로 눈을 감았다. 장열 기자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21

사진기 챙겨 천국에서 만나자던 목사

2005년 6월26일 뉴욕 퀸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마지막 전도집회가 열렸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를 했던 그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생애 마지막 집회를 조크로 매듭지었다. “여러분 모두를 훗날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반드시 사진기 챙겨 오세요”. 그 한마디는 청중의 웃음보와 눈시울을 동시에 건드렸다. 당시 전립선암, 파킨슨병 등을 앓으며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시작하던 그가 누구나 두려워할 수 있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20세기 후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를 창설해 세계를 돌며 유명 부흥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미남 목회자였다. 체격과 언변까지 좋았던 그레이엄 목사는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자 캘리포니아 모데스토 지역 전도 집회(1948년)에서 일종의 자기 선언을 한다.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유혹을 피하기 위한 다짐이었다. 그는 “유명 목사들이 가족과 떨어져 집회를 다니다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거나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 유명한 ‘모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으로 오늘날 ‘빌리 그레이엄 룰’로 불린다. 그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한국전쟁 도중 방한(1952년)해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이가 한경직 목사다. 당시 한 목사는 영락 교회 부지 문제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딱한 사정을 듣고 이후 전도집회 때마다 한 목사를 데리고 다니며 교회 사정을 말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 때문에 미국 교계는 한국전 직후 한국 교회들이 처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며 헌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이후 5차례(1956년ㆍ1973년ㆍ1980년ㆍ1984년ㆍ1991년) 더 한국을 찾았다. 특히 서울 여의도에서 진행됐던 집회 때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기독교 집회 사상 단일 행사에 최고 군중이 모인 기록이었다. 또 외국인 목사 최초로 두 번(1992년ㆍ1994년)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설교를 하고 미국의 대북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었다. 교계에서는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이 당시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국민 목사(America’s Pastor)’로 불렸다.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등으로 슬픔에 잠겼을 때 그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위로를 전했다. 그와 30년간 교제했던 한스페터 뉴스크 목사는 “그는 설교단 위보다 일상에서 더 진실하고 겸손했던 목회자”라고 평가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삶은 투병 생활 속에서도 곳곳에 울림을 전했다. 그의 아들(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소셜네트워크에 가족들 사진으로 빼곡한 아버지의 책상 모습을 공개해 가족애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항상 유명 인사만 만날 것 같지만 한 무명의 여성이 BGEA 웹사이트에 남긴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하는가”라는 고민에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모두 부자가 되거나 형통할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물질의 부유함보다 더 귀한 건 영적인 부유함”이라고 직접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물론 그레이엄 목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1950년대 미국 내 좌파 마녀사냥을 부추겼고, 걸프전을 앞두고 대표 기도자로 나서 전쟁을 옹호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또, 모르몬교 신자인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려고 BGEA 웹사이트에 ‘모르몬교는 이단’이라고 명시된 부분을 삭제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내부에서 신학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평소 손자(윌리 그레이엄)에게 “언젠가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야. 그러나 죽음은 하늘 나라로 거주지 주소를 바꾸는 것뿐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왔다. 2018년 2월 21일. 그레이엄 목사는 그렇게 기쁨으로 눈을 감았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21

"물질보다 영적 부유함 좇아라"…빌리 그레이엄 목사 답변

신을 열심히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한 여성이 가슴속에 답답한 고민을 토로했다. “우리 부부는 항상 삶 가운데 ‘하나님(God)’을 우선 순위에 두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매달 수많은 고지서를 내느라 정신이 없다. TV에서 한 설교자는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지난 21일 세계적인 목회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97·사진)가 운영하는 한 웹사이트에 올라온 질문이 소셜미디어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그레이엄 목사는 어떻게 답변했을까. 그레이엄 목사는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모두 부자가 될 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질병도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할거라는 기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수 역시 부자가 아니었고 그의 제자들도 부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은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시편 62:10)’고 했다”며 “물질의 부유함보다 더 귀한 건 영적인 부유함이며 그 가치를 좇아야 한다”고 답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불린다. 그의 아들(프랭클린)은 “아버지가 이젠 책상에 앉는 게 쉽지 않다”고 건강상태를 밝힌 바 있다. 그레이엄 목사는 매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남성’으로 꼽힐 만큼 미국 교계에 영향력을 미쳐왔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16-09-23

'여의도서 복음 외치고 싶다'···빌리 그레이엄 목사 '선교사 위한 보은잔치에 감격'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가 CTS(기독교TV)와 CBMC(기독실업인협회)가 주최하고 본사가 후원한 블랙마운틴 한국 선교사 감사 축제와 관련, “이는 유례없는 일”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또한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 복음 설교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지난 12일 워싱턴 기독교방송사 대표인 김영호 장로와 만난 자리에서 “세계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러한 일은 내 생애 처음 보는 경사”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예수를 통해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한 복음주의 목회자로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전도 집회를 했다. 또한 1992년과 1994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했었다. 또 대학생시절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고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 여사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등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90세 고령의 그레이엄 목사는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 자택에서 요양 중이며 이번 블랙마운틴 행사에도 초청됐지만 건강상 이유로 불참했다. 그럼에도 그레이엄 목사는 “이번에도 가서 설교하고 싶었지만 몸이 허락지 않았다. 혹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시 한번 여의도 광장에서 복음을 외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김 장로는 전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과 국민들에게 정중히 문안 드린다”며 “김 장로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영호 장로는 10여년 전부터 그레이엄 목사와 친분을 유지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블랙마운틴 선교사 후손 마을을 알게 돼 이번 감사 축제를 이끌어 냈다. 김 장로는 이번 블랙마운틴 방문 길에도 20여명의 한국파견 선교사들과 개별 인터뷰를 가졌다. 천일교 기자

2009-05-14

돌아온 탕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 손자

대중 설교와 역대 미 대통령들과의 친분으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집안에도 말썽꾸러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윌리엄 그레이엄 튤리안 치이비디지안. 그레이엄 목사의 손자인 치이비디지안 목사는 올해 34세의 나이로 그을린 피부와 스프레이로 한껏 치켜올린 헤어스타일로 등 외모부터 남다르다. 전통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 가치에 대해 저항하며 살았던 흥미로운 이력도 눈에 띈다. "우리 가족이 나타내는 모든 것에 대해 반항했다." 치이비디지안 목사는 16세부터 경찰서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그후 5년간 플로리다에서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마약에 빠져 광란의 파티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 그는 어느 날 또 한 차례의 광란의 밤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와 마루 바닥 위에 쓰러져 이렇게 외쳤다. "주님. 주님을 무시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했습니다. 제 방식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저를 좀 고쳐주세요." 돌아온 탕자 치이비디지안은 그후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됐다. 현재 플로리다주에서 뉴시티장로교회 담임을 맡고 있다. 이런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사진)'가 최근 출간됐다. 이 책에서 치이비디지안 목사는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과 다시 회생한 그의 스토리를 담담하게 적고 있다. 목회자가 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그를 비교한다. 치이비디지안 목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할아버지를 통해 하시는 일과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뉴시티장로교회에서 교회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브랜든 웰스씨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치이비디지안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했다. 웰스씨는 "치이비디지안 목사는 기본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전통적인 설교자"라며 이 점이 할아버지와 닮았다고 했다. 또 "복음을 이해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은사가 이들에게 공통적이다"고 덧붙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 머릿말에서 '손자가 목회자가 된 것은 내 기도의 응답이다'고 적고 있다. 조진화 기자 [email protected]

2007-09-17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대통령들 관계 파헤쳐

ABC방송국은 10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관계를 파헤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1시간 동안 방송된 '권력으로 가는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과 대통령들'에서 찰리 깁슨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지미 카터.조지 H. W. 부시.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을 인터뷰하며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우정과 그 이상의 관계를 들춰냈다. 그레이엄 목사는 카터.부시.클린턴 대통령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모두 나와 절친한 친구였다"고 말해 전 대통령들과 긴밀한 관계를 나타냈다. 빌 클린턴은 힐러리 클린턴과 첫 데이트로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갔을 정도로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레이엄의 팬이었다. 그는 청소년 기간 동안 자신의 용돈 중 일부를 그레이엄 미니스트리에 기부하기도 했다. 클린턴은 믿음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신앙없이 대통령을 맡는다면 더 힘들고 더 외롭고 더 불확실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힐러리 클린턴 역시 그레이엄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시끄러울 때 그레이엄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레이엄은 빌과 나를 모두 잘 하는 흔치 않은 인물"이라며 "용서 자체가 힘든데 특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해야할 때 더 힘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특히 나이가 들수록 목사인 그레이엄의 도움을 받는다고 고백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는 대통령이나 일반인이 다를바 없다"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전했다. 조진화 기자

2007-08-14

빌리 그레이엄 목사 부인 '루스 여사' 추모 물결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소'

지난 14일 타계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사모 루스 그레이엄 여사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전세계를 누비며 선교활동을 펼치던 그레이엄 여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글이 인터넷 상에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는 것. 뉴스위크지는 15일자에서 루스 여사의 일대기와 더불어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루스 여사의 결혼 생활 루스 여사의 자녀 양육기 등을 담은 기사를 게재했다. 또한 크리스천 방송 네트워크는 어머니와 같은 이름의 딸 루스 그레이엄을 인터뷰해 루스 여사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딸 루스 그레이엄은 "어머니는 중국 칭장에서 의료 선교사활동을 하셨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면서 "할아버지에 의해 성품이나 가치관등이 형성된 것 같다" 고 말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지난 17일 루스 여사 장례식장에 모인 조문객들에게 "루스는 관 속에 누운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며 "그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라며 고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했다. 이어 그는 "천국에서 대단한 환영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례식장에서도 위트를 잊지 않는 센스를 보였다. 그레이엄 목사는 당초 연설 할 계획은 없었으나 19명의 손자손녀들을 오랜만에 본 감격에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루스 여사는 허리와 목의 퇴행성 골관절염으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폐렴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그레이엄의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의 그레이엄 도서관에 묻혔다. 김양혜 기자 [email protected]

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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